기억이 전하려는 진실의 가치, 인간에 대한 희망

Posted by 탁발
2016.05.07 06:40 티비가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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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은 갈수록 예능전쟁으로 뜨겁기만 하다. 기존 금요일밤을 지키던 예능들 외에도 신규 예능들이 점점 더 늘어가기만 한다. 금요일을 타겟으로 새로 생겨난 예능만 해도 듀엣가요제, 노래의 탄생, 언니들의 슬램덩크, 히트메이커 등이 있고, 논란의 예능 나를 돌아봐를 대신해 새로 런칭한 어서옵쇼도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거기에다가 기존 금요일 밤을 지켜온 정글의 법칙, 나 혼자 산다도 여전하다.

 


얼핏 봐도 동시대간에 각 방송사들의 예능 경쟁이 심상치 않음을 잘 알 수 있다. 과거와 달리 주5일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어 예능 전쟁터가 토,일에서 금요일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은 금요일은 확실히 tvN이 강세였다. 나영석 피디의 새로운 예능들과 신원호 피디의 응답 시리즈들이 연이어 히트를 하면서 금요일밤은 tvN에 채널을 맞춰두면 그만일 날들이었다.

 

게다가 프로야구광이라면 금요일은 티비 한 대로는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 없는 상황이 될 지경이다. 즐거운 비명이라도 질러야 하겠지만 사실 너무 지나친 예능 프로그램들의 범람은 반드시 피로감을 동반하게 될 것이다. 일주일의 노동을 끝내고 휴식과 즐길 거리를 찾게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청자 모두가 예능만은 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시그널에서 기억으로 이어지는 tvN의 드라마 편성이 더욱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응팔로 시작해서 시그널, 기억 그리고 다음 주부터 방영될 디어 마이 프렌드까지 예능 프로그램들의 피 터지는 전쟁터 속에서 조금은 차분하게 금요일 밤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의 채널 선택권을 보장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엉뚱한 말로 서두가 너무 길어졌다. 그것은 이제 기억이 마지막 하루만을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고, 그 아쉬움이 벌써부터 너무 큰 탓일 것이다. 종영을 하루 앞둔 기억은 박태석을 통해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복수가 아니라 진실을 증명하려는 것이라는 작가의 의지다. 

 

그리고 작가가 지키고자 하는 또 다른 것은 바로 희망이다. 인간에 대한 희망 바로 그것이다. 그 희망의 시그널을 15회에 두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그것이 고작 드라마 속의 허구라 할지라도 왠지 따뜻해지고 이런 각박한 세상에 살면서도 조금은 안심이 되게 해준다.

 

박태석은 이찬무에게 더 이상 본심을 숨기지 않고 아들 정우 사건의 진실을 밝히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고 해고라고 소리를 지르는 이찬무에게 나가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했지만 기실 그것은 법무법인을 나가겠다는 의미였다. 그런 박태석이 사무실로 돌아오자 정진은 웃는 얼굴로 사표를 내민다. 박태석과 함께 하겠다는 의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뒤따라 들어온 봉선화도 사표를 내민다. 자기 사표를 받아줄 사람은 박변호사밖에 없다면서 생글생글 웃는다. 그런데 그 사표가 생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살다 살다 핑크색 봉투의 사표는 처음이었다. 핑크색 사표가 낯설어서 놀라고, 그 의리에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논어의 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말처럼 의로운 사람 박태석 곁에는 그를 지키는 또 다른 의로움이 있어 참 다행이었다.

 

그리고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도 먼 관계인 서영주와 나은선의 통화 역시 세상에 없을 따뜻한 우정을 보였다. 나은선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 박태석이 아내인 서영주에게 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 알려주며 알츠하이머를 앓는 남편을 지키는 서영주를 걱정했다. 그러자 서영주도 역시 “동우엄마는 혼자라서 더 많이 힘들 것 같아요. 동우엄마 참 대단해요. 귀찮더라도 식사 거르지 말고 꼭 챙겨드세요”라고 했다. 듣는 나은선은 물론 보는 시청자도 가슴이 뜨거워져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은 현실에 없을지도 모른다. 허구라고 냉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그렇게 해준 사람은 없었다고 비관하기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을 반성케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것이 곧 희망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포기하지 말자는 것이 아닐까? 진실과 희망이라는 두 키워드로 이 슬프고 따뜻한 드라마 기억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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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슬퍼서 울고 따뜻해서 또 울고

Posted by 탁발
2016.05.01 07:00 티비가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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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소리 없이 강한 드라마다. 화제성이나 시청률 면에서 대단히 뜨겁지는 않지만 이 드라마를 한 번 본 사람이라면 끊을 수 없는 대단한 중독성을 느끼게 된다. 그 작용의 중심에 이성민의 미친 연기력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실은 작가의 묵직한 내공의 필력이 작용한 결과라고 확신할 수 있다.

 


김지우 작가는 무엇보다 복수라는 키워드에 강하다. 이번 작품은 복수라고 단순히 규정지을 수 없지만 복수의 정서가 전반에 깔려 있다. 또한 복수라고 하더라도 상당히 역설적이고, 세련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복수의 긴 행보에 정의를 동행시킨 것이 그렇다. 또한 주인공 박태석이 복수를 해나가는 과정이 마치 매미의 마지막 칠일 같은 슬픈 끝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마지막 2회만 남겨둔 시점. 박태석은 15년 전 사건의 진실에 거의 한두 발짝을 남겨둔 정도다. 그와 동시에 알츠하이머의 활동 역시 왕성해져서 매 순간이 위태롭기만 하다. 그렇지만 “내게는 시간이 없어!”라고 절규할 수밖에는 없는 박태석의 마음은 바쁘기만 하다. 거의 다 온 것 같아서 더욱 안타깝기도 하다.

 

그래서 박태석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슬프다. 그런데 슬프면서도 왠지 따뜻한 감정을 더 받게 된다. 주변의 사람들 때문이다. 아내가 그렇고, 그를 돕는 새내기변호사와 비서가 그렇다. 그들로 인해 이 슬픈 이야기가 따뜻해질 수 있었다. 슬퍼서 눈물이 나고, 따뜻해서 또 눈물이 난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끝날 때쯤에는 그 슬픔이 눈덩이처럼 더욱 커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 슬픔을 기꺼이 받아드릴 수 있다. 박태석이 정의로운 일들을 모두 처리하더라도 정작 본인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상대들 또한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더라도 박태석의 시계는 비극의 카운트다운을 향할 수밖에는 없다.

 

한국 드라마는 해피엔딩의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모두들 사는 게 너무도 힘들어서 드라마에서라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그 무의식의 바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슬픈 결말이 일상을 더 억누를 거라는 것도 괜한 걱정일 수 있다.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해피엔딩에 못지않은 정화를 준다.

 

일본말로 슬픔은 ‘가나시미’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의 자음을 모두 떼어내면 ‘아아이이’가 된다. 굳이 해석하면 ‘아 좋다“ 정도가 된다. 억지가 될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어쩌면 비극에 더 친화적인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 생각에 편을 들어주는 것이 바로 기억이라는 드라마다. 슬퍼서 참 좋다는 느낌을 준다.

 


친구란 슬픔을 대신 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언어도 다시 생각해봄직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지 않은 점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만일 기억이 태양의 후예처럼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면 엔딩에 대해서 작가에게 압력(?)을 가해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처음부터 이 드라마를 진지하게 시청한 사람이라면 태석의 슬픔을 함께 안고 갈 준비가 돼있을 거라 믿는다. 마치 친구처럼 말이다. 오히려 마음껏 울고 후련해질 그 결말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또 모를 일이다. 그것이 슬퍼서 좋은 이 드라마의 감상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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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절망과 슬픔을 따뜻한 감정으로 바꿔주는 이름, 가족

Posted by 탁발
2016.04.23 08:32 티비가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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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기억은 교통사고 뺑소니로 죽은 아들의 범인을 쫓는 일종의 스릴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회가 거듭될수록 그런 이야기보다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이성민과 그의 가족들이 겪는 고통과 불안 그리고 그 극복의 과정에 더 관심이 간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이성민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조마조마해서 가슴이 아플 지경인데 이상하게도 이 드라마는 그 아픔을 따뜻한 감정으로 바꿔버린다.

 


처음에는 아내 김지수였다. 님이라는 단어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부부란 한 인간이 갖는 가장 깊고 긴 관계이면서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 같이 불안정한 관계이기도 하다. 아직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남편이 알츠하이머라는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그 유리 같은 관계를 깨도 욕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 늙어서 치매가 와도 그 가족 전부가 겪어야 할 불안과 고통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인데 애들도 아직 어린 때에 알츠하이머라니. 어쩌면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 남자를 버리는 편이 현실적인 판단일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도 현실에서는 충분히 많이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사업만 망해도 이혼하는 판에 수십 년 고생길이 열릴 알츠하이머라면 말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아내는 오히려 남편의 병을 미리 알지 못하고, 남편이 헤어진 전처의 집에 들락거리는 것을 오해한 것이 미안할 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아무에게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못한 남편의 그 고독에 따뜻한 손을 얹어주었다. 리얼리티는 이럴 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럴 때는 세상을 반영하지 않는 것이 더 따뜻해서 좋았다.

 


그렇게 박태석은 아내라는 산을 넘었다. 같은 가족이라도 부부관계와 자식과의 관계는 또 다르다. 아들 정우는 얼마 전부터 아빠가 이상한 것을 눈치 채고 있었다. 예민한 나이에 모를 리가 없다. 어리지만 왠지 그것을 아빠에게 내색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도 무섭고 당황스럽지만 아빠에게 그런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참 안쓰럽고 대견했다.

 

그런데 더 이상 모른 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아이스크림을 사러간 아빠가 통 오질 않았다. 엄마가 찾으러 간다고 했지만 아들은 먼저 달려가 버렸다. 한참을 달려가자 아들의 눈에 아빠가 보였다. 두 손에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쥔 채 얼어붙은 아빠의 모습을 보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빠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잠깐 사이지만 고민스럽기만 하다.

 

그런 아들의 복잡한 감정을 구해준 것은 아빠 박태석이었다. 아빠는 정우를 보자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반가워했다. 아빠와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들 정우는 대신 아빠보다 앞에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아들 뒤를 박태석은 말없이 따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슬퍼서 가슴이 아릴 지경이었다.

 


그냥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픔이 커질수록 왠지 더 따뜻해지는 심정인 것이 이상했다. 하필이면 가족들과 전에 해보지 못한 벚꽃구경을 가서 벌어진 이 난감한 해프닝 속에 어린 아들 정우는 가슴을 정말 뜨겁게 만드는 직격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빠는 아들과 함께 조깅을 나갔고, 벤치에 잠시 쉬는 동안 결국 아들에게 자신의 병을 고백한다.

 

지난 밤 보인 아들은 어린 나이답게 당황하면서도 동시에 어른스럽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는 말해줘도 될 것 같았다. 아니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꾸 숨기다가 결국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영영 기억을 잃어버리면 아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린 아들에게 자기 불치병을 고백하는 아빠의 심정은 도무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렇게 점점 기억으로부터 유리되는 박태석은 갈수록 절망적이 되어간다. 그렇지만 기억이 빠져나간 자리에 절망만 채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박태석이 겪는 모든 절망과 슬픔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따뜻한 위로로 바뀌어지고 있다. 그래서 울다가 웃다가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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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망각보다 무서운 기억의 오작동

Posted by 탁발
2016.04.02 08:03 티비가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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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밖에서 잠이 들었다. 술꾼의 아내라면 심심찮게 겪는 일이다. 그런데 그곳이 술집도 아니고 길거리도 아닌 전처의 집이었다. 그것도 전처가 전화를 받아 그 사실을 알려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술이 원수라고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다. 아내는 제정신을 찾기 힘들 정도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다. 남편이 전처의 집에서 잠들었다는 사실도 받아드리기 힘든데 전처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알린 것에 더 예민해지기도 한다.

 


tvN 드라마 기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고도의 심리적 갈등을 그린 장면을 선보였다. 한 남자들 두고 두 여자가 다투는 것은 아닌데 왠지 그런 것이 아닐 수 없는 묘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연기하는 두 명의 중견 연기자 김지수, 박진희의 노련하고 깊은 연기가 있었다. 그 상황은 마치 복선인 듯 아닌 듯 미묘한 잔향을 남겨 더욱 감칠맛이 났다.

 

우선 이성민이 전처인 박진희의 집을 찾아가 죽은 아들의 침대에서 잠이 든 것이 김지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취중이라 할지라도, 아니 취중이라는 것이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것이 의식보다 더 무거운 까닭이다. 게다가 얼마 전 남편이 흘리고 간 지갑에서 남편의 옛 가족사진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김지수가 이성민에게 후처 운운하며 감정을 폭발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닌 상황이었다. 아마도 이성민이 정상이었다면 김지수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깊은 상처가 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성민 본인도 답답하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술에 정신을 다 빼앗겨도 술꾼에게는 하늘이 내린 귀소본능이 있어 과거가 아닌 현재의 집으로 돌아가게 해줬으니 말이다.

 



그렇다. 그것은 이성민이 납득하지 못한 것이 맞았다. 이성민이 취중에 박진희의 집을 찾은 것은 바로 알츠하이머의 장난이었다. 사무실에서 쪽잠을 잔 이성민은 새벽부터 친구인 정신과의사 최덕문을 찾아 지난 밤 해프닝에 대해서 물었다. 옛 기억이 선명해지는 것은 알츠하이머의 보편적 증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이미 단단히 오해를 하고, 상처를 받은 아내를 이해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직은 40대. 아직 아이들도 어리고 아내도 젊다. 그런데 내가 알츠하이머에 걸렸다고 어떤 가장이 쉽게 입을 열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계기가 전처의 집에 가서 잠든 자기 행동을 해명하기 위한 것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두 번 결혼한 이성민에게는 망각보다도 멀어진 기억이 선명해지는 기억의 오작동이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기억의 원근법을 무시하는 이 기억의 오작동이 역으로 이성민의 결정적 무기가 될 것이다. 15년 전 어린 아들을 치고 뺑소니를 친 범인을 쫓는데 이 기억의 오작동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치 15년 전의 누군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주는 것과 같은.

 


그러나 그것은 나중 일이고 일단 이성민은 곤혹스러울 뿐이다. 초기라는데 불쑥불쑥 찾아드는 알츠하이머 증상도 두렵다. 술을 멀리해야 하는데 직업상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그야말로 딜레마의 형국이다. 그런 이성민의 딜레마를 해결할 드라마틱한 해법은 바로 아내 김지수가 이성민의 옷에서 알츠하이머 패치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장은 부부가 합심해서 병과 싸우자는 훈훈한 모습은 아닐 것이다.

 

김지수 입장에서는 이처럼 심각한 병을 숨긴 남편이 또 미울 것이고, 자신을 믿지 못한 것은 더 괴로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 남자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선택한 남자였다. 그래서 결국 병에 걸린 당사자보다 더 슬픈 역할을 해야 할지 모르는 입장이 될 지도 모른다. 남편이 현재를 잃으면서 과거로 돌아가는 그 모습을 알고 지켜봐야 하니 말이다. 눈물의 여왕 김지수를 다시 만나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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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있기도 없기도 한 희망. 미생은 인생이었다

Posted by 탁발
2014.12.21 07:42 티비가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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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 이유는 사회를 지탱하는 굵은 부분이 워낙 보수적인 탓이다. 정부가 가장 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대기업이 더할 것이다. 아쉽게도 대기업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내부에서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겉으로 드러난 대기업의 모습은 그렇다. 지난 몇 달간 우리와 함께 울고 웃었던 드라마 미생에서 역시 그랬다.

 

인턴에서 살아남아 원인터에 남았지만 다른 동기와 달리 장그래는 2년 계약직이었다. 많은 동료들의 도움과 간청이 있었지만 보수적인 집단인 대기업에 살아남지는 못했다. 업무수행능력이 입증되었지만 결국 장그래의 초라한 스팩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었다. 대단히 희망적이었지만 기적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장그래의 정규직 전환은 무위로 돌아갔다. 희망은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라지만 기적은 확실히 없었다.

 

그 무거운 소식을 전하러 영업3팀에 온 선차장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무거운 침묵의 의미를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때 장그래 아니 임시완의 표정은 참 멋졌다. 많은 희망을 걸어야 했던 아니 걸고 싶었던 끝에 확인된 절망을 정말 잘 표현했다. 이때 임시완의 표정에 20회 동안의 미생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확실히 아이돌로서의 임시완은 아무 매력을 느낄 수 없지만 배우로서의 임시완은 정말 잘한다. 미생을 20회씩이나 촬영한 때문인지 임시완의 눈빛은 더욱 깊어져 있었다.

 

 

그렇게 장그래는 원인터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3주 후.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난 후 오차장이 차린 회사에서 장그래와 김대리는 다시 만났다. 오차장과 장그래가 떠난 후 김대리는 원인터를 자발적으로 나온 것이다. 월급쟁이 봉급과 진급이 전부라지만 김대리에게는 사람이 먼저였던 것 같다. 그렇게 다시 모인 영업3팀은 완생 같은 미생의 길을 다시 시작했다.

 

회사를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직업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매일 부대끼던 사람들과 그 일상을 잃는 것이다. 떠난 사람에게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시급하기에 사람과 일상의 상실에 낙담할 여유라고는 없지만 남겨진 사람에게는 후자만 있기에 김대리의 합류는 다소 극적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고, 수긍이 가는 결말이었다.

 

없기도 하고 있기도 한 것이 희망이라지만 미생은 거자필합의 결말을 가져갔다. 현실도 꼭 그걸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결말부분이니 이 정도의 작위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미생은 회사가 아닌 인생을 다룬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없을 때의 희망은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있을 때의 희망은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렇다. 사람에 대해서는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건져지는 것이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은 것이다.

 

 

20회 그러니까 10주간 우리는 오차장과 김대리, 장그래 그리고 안영이, 장백기, 한석률 등을 통해 미생인 우리와 똑같은 인생을 지켜봤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자신의 일상과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인데 묘하게도 일상과 다를 바 없는 미생에 폭 빠져 지내야 했다. 힘겹고 버거운 일상에 등 돌리는 대신 그것을 향해 똑바로 서서 바라본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였다.

 

미생에서 느낀 동일성의 감정은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갖지 못했던 것이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 같은, 그래서 때로는 진심으로 울컥하고 환호하기도 했던 드라마였다. 그러나 그런 열광도 결국은 끝나고 만다. 미생은 드라마 속이나 바깥이나 모두 어우러져 인생의 축소판이었다는 것이다. 새로 배울 것도, 다를 것도 없는 평범하게 하루를 사는 모두의 일상이자 인생이 담긴 드라마였다. 언제 또 이런 드라마를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조차 인생을 닮아있다. 미생과 함께 한 10주간은 정말 행복했다. 감사한 일이다. 그동안 쓰는 일보다 보는 일에 더 집중해야 했던 미생일기도 이렇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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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 하세요..
    '미생'을 보며서 박노해의'다시'라는 시와
    동화-'파랑새'가 생각이 나네요..

    희망찬 사람은 / 그 자신이 희망이다 / 길 찾는 사람은
    / 그 자신이 새길이다/참 좋은 사람은
    /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 사람 속에 들어 있다
    /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 사람만이 희망이다

    '미생'에서 '장그래'가 찾는 길은 사람 속에서 '희망'을 찾는 여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네요...
    P.S- 가족과 함께 즐거운 성탄절 되시길 바라며...
    • 돌이켜 보면 크리스마스가 즐겁거나 행복했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교회를 다녔던 중고등학교 시절이 그나마 뭔가를 하면서 분주했던 것이 전부네요.
      그래도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산타클로스를 기다려 볼까요? ㅎㅎ
  2.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더 나은 미래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좋은 포스팅 보고 갑니다.

미생. 술맛 모르는 이성민의 술맛 나게 하는 취중 연기

Posted by 탁발
2014.11.08 08:08 티비가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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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제 7화의 주제는 승진과 월급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한 것은 오과장 이성민의 술 취한 연기였다. 한국만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히나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은 술이 꼭 필요하다. 접대, 회식 등 빈번한 술자리가 열리는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술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술맛을 알게 된다. 이때 주량은 별 의미 없다. 어차피 형편없이 취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7화의 내용은 원작에서도 인상 깊게 남았던 부분이었다. 오과장이 하고 싶었던 아이템이 아니라 상사인 김부장의 아이템으로 가야 하는 상황. 불편한 상황이지만 그나마 부장이 미는 아이템인 만큼 만년 과장인 오과장에게도 승진의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있다는 위안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사내 정치로 인해 밀려날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연히 마주친 전무가 자원팀으로 아이템을 넘겨버리는 바람에 일거리마저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오과장에게 상사의 권한을 남용하던 김부장조차도 전무의 전횡에 불쾌해 하지만 찍소리 못하고 말았다. 그것이 수직관계로 유지되는 한국 직장문화의 민낯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들 자리를 뜨고 영업3팀만 남아 말없이 식탁 위의 음식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음식에게 화풀이라도 하는 것처럼 혹은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음식을 먹어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은 있을 법하다.

 


이럴 때 누구라도 술에 취하고 싶기 마련이다. 말은 술맛이 좋기 때문이라지만 사실은 더 쓴 맛으로 세상을 잊고 싶기 때문이고, 때로는 그 술이 현실보다 쓰지 못해 취해버려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철저히 혼자 취하게 된다. 그렇게 혼자 취해 비틀거리는 중년을 길거리에서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오과장은 그렇게 흔한 풍경으로 밤거리를 비틀거리며 귀가했다.

 

집 앞에 도착하자 참았던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아내가 문을 열어주자 화장실로 먼저 튀어간다. 토한다. 여기까지는 드라마에서조차 참 흔한 풍경이다. 그런데 이성민이 하는 이 연기에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일단 지저분하고 더럽다. 술 취한 연기를 하는 것인지 진짜 술에 취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침을 질질 흘려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변기에 지나치게 머리를 깊이 박고 토악질을 해댔다.

 

촬영을 위해 깨끗이 닦아뒀겠지만 그래도 변기에 그렇게나 깊이 머리를 처박는 일이 제 정신이라면 쉬운 일이 아니다. 덕분에 그와 같이 변기에 머리를 박고 토할 때 듣던 좁은 공간의 울림이 공유되면서 보는 이도 덩달아 취한 느낌에 빠지게 했다. 아니 형편없이 취해서 그렇게 토하면 왜 술을 먹었나 후회하던 때가 떠올라 온몸에 한기가 돌 지경이었다.

 


그렇게 진하고 리얼한 연기 끝에 이성민은 카메라를 직접 주시했다. 그리고는 당신들이 술맛을 알아?”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의문형의 대사지만 이 대사의 의도는 반대였을 것이다. 당신들이 느끼는 술맛을 나도 안다고 밝히는 것 같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리얼한 취중 연기를 보이는 이성민은 실제로 술을 못 마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과장이라면 몰라도 배우 이성민은 술맛을 모른다. 그런데 이성민의 연기를 보면 술맛을 저절로 알 것만 같다.

 

그리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당신들이 술맛을 알아?”하는 그 눈 풀린 시선에 그만 심장이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덥수룩한 수염에 까칠한 피부. 초점 잃은 눈동자. 시청자에게 술을 권하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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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완판녀가 나올 수 없는 아름다운 이유

Posted by 탁발
2014.11.05 08:13 티비가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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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 뒤따라서 완판 소식이 들리고는 한다. 그래서 연기자들에게 완판녀, 완판남의 또 다른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그것이 드라마와 배우의 파워를 증명하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 결과를 낳기 위해서 드라마는 불필요하거나 혹은 과도하게 상품을 노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요즘 드라마에서는 필수가 되어버린 PPL광고이기에 이제 드라마 연출자에게는 이 PPL을 어떻게 다루냐가 큰 화두로 안게 되었다.

 

요즘 화제성에서 으뜸인 미생이 이 PPL로 또 다시 주목을 받았다. 미생 역시 상업방송의 드라마이기 때문에 PPL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미생의 PPL이 다른 드라마와 다른 것은 시청자가 PPL을 알아차리거나 혹은 불편한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러는 이 드라마에 PPL이 없나 싶을 정도였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미생의 PPL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통의 드라마에 눈에 띄게 등장하는 PPL은 수입차가 화려한 패션 아이템 등이 주류를 이룬다면 미생의 PPL은 사무용품이나 믹스커피 등 일상에 널린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청자 입장에서는 PPL이 간접광고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소품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미생의 세트장에 허투루 놓인 소품이 없도록 한 깐깐한 연출자의 공로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요즘 사극이 아닌 이상 반드시 등장하는 휴대폰 PPL조차 간접광고가 아닌 것 같은 착각을 주기도 한다. 또한 운도 좋다. 예컨대, 오과장이 팀원들에게 커피를 쏘겠다며 결국은 믹스커피를 타주는 장면이 있었다. 거기서 오과장은 분명 PPL 대사인 그래도 이게 황금비율이야라고 했는데, 보통이라면 노골적인 상품 홍보로 봐야 하지만 드물지 않게 직장상사들의 너스레와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상황에 녹아든 경우를 들 수 있다. 미생의 PPL이 시청자에게 들키지(?)않는 이유다.

 

이재문 PD의 각오는 왜 이 드라마가 공감을 얻고,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지를 수긍하게 해준다. “이 빡빡한 현실을 하는 사람들에게 절대 장난치지 말자고 했다고 한다. 감동을 주겠다니, 위로를 주겠다는 등의 거창하고 포장된 말이 아니라 더 신뢰가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PPL인들 값비싸고 화려한 아이템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자주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 특히 PPL이다. 가난한 고학생인데 입는 옷과 들고 다니는 가방이 온통 명품인 경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요즘은 이런 PPL이 너무 기승을 부리다보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부분도 생겨났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드라마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부작용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상식으로는 결코 칭찬할 수 없는 드라마 속 PPL마저 칭찬하게 된 것은 대단히 스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배우의 연기도 아니고, 작가나 연출의 재능도 아닌 광고를 칭찬한다는 것이 정말 웃긴 일이다. 물론 미생의 인기가 놓아졌기 때문에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볼 때 완판녀가 나올 수 없는 미생의 아름다운 이유는 역시나 다른 드라마 제작자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교휸이라고 하고 싶다. 지난 미생 6회 박대리 에피소드에서 장그래는 꼼수에는 정수로 대적한다는 바둑교훈을 말한 바 있다. 대게의 PPL은 꼼수다. 미생에서는 정수가 된 비결은 상업드라마들이 배워야 할 기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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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죄송합니다 하니 감사합니다 받는 이상한 인사

Posted by 탁발
2014.11.02 09:18 티비가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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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그래가 마침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둑에서 배운 것들이 사회에서, 그것도 참 치열한 상사에서 통한 것이다. 장그래는 종합상사 영업맨이라면 필수라고 할 수 있는 협력업체 실무교육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그 담당자가 과장에서 박대리로 바뀌었다. 귀찮은 일이니 평소 소극적인 박대리에게 떠넘긴 것이었다. 그런 박대리를 이미 파악하고, 평가해버린 장백기는 사무실 핑계를 대고 먼저 빠져나갔지만 요령 피울 줄 모르는 장그래는 끝까지 현장에 남아있었다.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협력업체 사무실에서 들려온 대화내용이 박대리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심하고 소극적인 박대리라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대처능력 또한 없었다. 문제가 생기면 남 탓이 아니라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자학하는 스타일의 박대리는 협력업체의 불성실한 모습을 보고도 항의 한 번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이번에도 그러려고 발길을 돌리는데 굳이 남아있던 장그래의 보살(?)같은 얼굴이 들어왔다.

 


그러면서 장그래에게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물론 자신은 실제로 한 번도 그러지 못한 강경하고, 정상적인 문제해결방식이었다. 소심한 박대리였지만 차마 후배 앞에서 자기가 한 말을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힘없이 돌아서려던 박대리는 다시 용기를 내어 협력업체 과장에게 지금껏 누구에도 해본 적 없는 말을 해내고야 말았다. 별 것 아니었다. “절차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결국 이 말이 화근이 되어 원인터에 법무팀, 리스크팀 들이 모두 모인 대책회의가 열리기는 했지만 규모가 컸을 뿐이지 사실은 거래가 끊긴다거나 혹은 누군가 징계를 당하는 일이 생기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협력업체에게는 다른 의미였다. 갑이 재채기를 하면 을은 감기몸살에 걸린 것처럼 구는 것이 현실이다. 갑인 원인터의 박대리가 그동안 무시해도 좋을 만큼 만만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절차대로라는 말의 무게감이 컸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협력업체 사장까지 원인터에 들어와서 해명과 사과를 하고 결과적으로 원인터는 훨씬 더 좋은 조건으로 협력업체와의 계약사항을 수정할 수 있었다. 물론 박대리에게 불이익도 없었으며 오히려 반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 과정이 모두 끝난 후, 회사 앞에서 장그래를 본 박대리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당신이 내 가난한 껍질을 벗겨줬어대리라는 직급이 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입사원에게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당연히 장그래는 겸연쩍을 수밖에 없었고, 박대리의 고백에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당연했다. 그러자 박대리는 감사합니다라고 따라서 고개를 숙이며 응대했다. 한쪽은 죄송하다고 하고, 한쪽은 감사하다고 하는 이상한 인사가 벌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묘하게 이 장면에서 뭉클해지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정확히 어떤 감동이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가슴을 콱 움켜잡히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직장을 갖고 생판 몰랐던 사람들과 알게 되고, 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좋은 관계를 맺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장그래의 동기들이 인턴에서 정식사원으로 입사했지만 선배들의 텃세와 견제로 일은 고사하고 인간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것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거나 혹은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물론 미생에는 오과장이라는 인물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심지어 안영이가 겪는 내부고발자와 여성이라는 이중고를 보면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아군이 때로는 적보다 더 괴로운 존재가 된다. 그래서 장그래와 박대리의 맞절이 더욱 아름다웠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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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탁발님의 미생 리뷰가 참 좋네요.
  2. 안녕 하세요.
    '미생'의 오프닝에서 푸른색 빛깔을 보며서
    '파랑'색은 자유를 나타내는 색인데, 감정은 슬픔이라는
    아니러니가 있네요.
    개인적으로 '춤추는 대수사선'과 '덱스터' 그리고 '미생'의 오프닝은
    드라마 성격과 잘 맞는 오프닝이라서 감정이입이 쉽게 되네요.
    우리나라에 '미생'만한 오프닝이 있을까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오프닝이라고
    생각했요...

    *'미생'리뷰는 탁발님의 리뷰가 좋아서.... 한번 오프닝 칭찬을....
    • 안녕하세요.
      파란색에 대한 아이러니를 말씀하시니 생각나는 시가 있습니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일가를

      김수영의 '푸른 하늘은'이란 시 중에 일부입니다.
      그냥 이 시가 간만에 떠올랍습니다....

미생. 욕설의 카타르시스 선사한 오과장의 빵 터지는 사과문

Posted by 탁발
2014.11.01 08:03 티비가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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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우리나라처럼 욕이 다양하고 때로는 심한 곳도 없을 것이다. 별의 별 것들이 온통 욕에 동원된다. 인류의 가장 오랜 반려동물이라는 강아지조차도 이 욕의 대단히 큰 지분을 차지할 정도면 말 다했다. 그렇지만 욕이 아닌 ’ ‘많이까지도 욕이 될 줄을 꿈에도 생각 못했다. 현실이라면 몰라도 아무리 케이블이라도 티비 드라마이기에 방심했던 허를 제대로 찔렸던 것이다.

 

오과장은 자원팀 정과장과 트러블이 생겼다. 예전 업무협조에 반드시 첨부되어야 할 BL(탁송화물증권)원본이 사라진 것이다. 워낙 성격이 불같은 자원팀 오부장의 기세에 눌려 정과장은 제대로 설명을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오과장 탓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작년에 오부장의 여사원 성희롱 문제가 불거졌을 때 오과장이 증인이 섰다는 이유로 앙심을 품고 있었던 오부장은 개인의 분풀이를 할 좋은 기회로 생각해버릴 것을 정과장은 미처 몰랐던 것이 사단이었다.


오부장은 오과장에게 따지라고 정과장을 닦달했고, 마지못해 영업3팀으로 향한 정과장은 난처했지만 부장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오과장에게 왔다가 그만 거짓이 진심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차마 말해선 안 될 말까지 나오고 오과장은 정과장에게 주먹을 날리게 됐다. 이제는 BL이 문제가 아니었다. 폭력을 행사한 오과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됐다. 결국 오부장은 오과장에게 공식 사과문을 사내 인트라넷에 올릴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어길 시 정식으로 문제삼겠다고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결국 오과장은 사과문을 올리겠다고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오과장은 태연한 가운데 오과장의 사과문을 본 직원들은 아연실색했다. 특히 김대리는 좌불안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과장이 올린 사과문은 미안하다 좀 많이가 전부였고, 뭔가 조롱하는 듯한 사과 애니메이션이 첨부된 것이다. 문제는 사과문이었다. 문장 그대로 해석하면 다소 성의 없기는 하지만 미안하다고 하는 것 같지만 이 문장은 한국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욕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그 사과문을 보는 순간 빵 터지고 말았다. 역시 오과장이라는 감탄이다. 오과장이 당하는 과정들을 보면서 부글부글 끓던 속이 이 사과문을 보는 순간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딱히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회사 혹은 특정 집단 내에서 억울한 상황을 겪었던 모든 사람들이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욕설이라는 것이 대부분 좋지 못하지만 이럴 때는 구구절절 긴 말보다는 이런 짧고 굵은 욕설 한 마디가 백번 낫다. 욕설의 미학, 욕설의 카타르시스다.

 

그런데 그 와중에 또 다른 일이 조용히 전개되고 있었다. 자원팀과 영업팀에서 한판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자원팀 신입사원 안영이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 캐비넷을 뒤져 문제의 그 BL을 찾아내고 만 것이다. 자기 팀 정과장을 의심했었기 때문에 캐비넷을 뒤졌던 안영이지만 어쩌면 그 BL이 없기를 바랄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정과장도 그렇지만 사건이 있던 때에 인턴으로 일하던 장백기 태도 역시 수상한지라 안영이로서는 진실을 그저 묻어둘 수는 없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BL을 캐비넷에서 확인하고 만 것이다.



BL은 개인의 양심문제로 바뀌었다. 인턴 때와 달리 찬밥신세에 여성차별에 시달리고 있는 안영이는 고민에 빠졌다. 그 문제를 밝히게 된다면 가뜩이나 좁은 자원팀 내의 입지가 더욱 사나워질 것이 너무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선차장을 돕다가 조언을 구하게 된다. 선차장은 옳은 일을 모른 척 하면 버티기가 좀 쉬워지나?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남녀가 상관 있나?”라는 반문으로 대답한다. 결정은 결국 본인의 몫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안영이는 사실을 밝히기로 결정했고, 장그래를 찾아가 자원팀 캐비넷 비밀번호를 알려주면서 차마 자신이 직접 건네지는 못하겠다고 말한다. 아주 속 시원한 해결은 아니지만 신입사원으로 큰 용기를 낸 것이다. 그러나 장그래는 불 꺼진 사무실에서 캐비넷을 뒤지다가 그만 정과장에게 들키고 만다. 그때 정과장에게 멱살을 잡힌 채 끌려가는 장그래 앞에 오과장이 등장한다. 그의 손에는 BL이 들려있었다. 이제 전세역전이다.



오과장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끝내 지시를 어기고 자신을 위해 자원팀 캐비넷을 뒤지다가 봉변을 당한 장그래에게 술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런 다음날 아침 오과장은 집을 나서다가 아파트 문이 열리지 않아 당황했다. 문밖을 살피니 거기에 장그래가 침을 흘리면서 잠들어 있었다. 술에 취한 오과장을 집까지 무사히 들여보내고 장그래는 그만 그 자리서 골아떨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장그래는 또 한 발 혼자가 아닌 모두의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어쩌면 오과장을 닮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생 5회에는 오과장의 기억에 오래 남을 사과문과 함께 선차장과 안영이를 중심으로 회사라는 조직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편견과 차별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서 다소 소극적이지만 진지하게 다뤘다. 특히 워킹맘들이 겪는 이중고를 조명해 완곡하게나마 우리사회의 변화를 종용하는 의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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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성민 씨는 어느 작품에서나 넘칠 정도로 제 몫을 하시는 것 같아요.^^

미생. 일상을 사랑하게 하는 드라마

Posted by 탁발
2014.10.26 09:50 티비가요/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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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에서 최전무로 출연 중인 이경영이 이재문 PD에게 보낸 트위터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일상을 초라하게 만드는 드라마가 있는가 하면, 일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드라마가 있다당연히 미생은 후자의 경우라는 뜻이며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이경영이 보낸 트윗 내용은 누군가의 댓글을 전달한 것이다. 적은 분량이지만 미생에 출연하고 있는 배우에게 참 뿌듯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묘하게도 미생 역시 여느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높은 빌딩과 번듯한 일류기업의 내부가 비쳐지지만 그것이 보는 이를 주눅 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애환과 연민을 갖게 한다. 좀처럼 사무실 풀샷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근본적으로 미생이라는 대전제가 살아 있는 탓으로 봐야 할 것이다. 특히 4회 마지막에 인턴에서 2년 계약직이지만 다시 사원으로 돌아온 장그래에게 우린 모두 미생이야라고 말하는 오과장의 대사는 시청자를 이 드라마에 쏙 빨려들게 하는 마력을 과시했다.

 


오과장의 이 말은 마치 당신들은 이 드라마에서 눈을 떼지 못할 거야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우리네 일상이 참 힘들고 때로 서럽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그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고 혹은 잊고 싶은 마음에 로맨틱한 이야기에 온 마음을 다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허탈감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미생에는 러브라인도 없고, 우리의 일상을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과시도 없다. 그래서 또 미생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 드라마의 진정한 신의 한수는 이성민이다. 드라마 등장인물들과 전부 연관이 있는 유일한 배역인 오과장은 그만큼 주어진 임무가 막중했다. 최고위층 전무부터 인턴 장그래 심지어 다른 팀은 안영이, 한석율까지 오과장을 거치지 않는 배역이 없다. 그들 모두와 만나는 지점에서 오과장은 뜨거운 호흡으로 이들과 한 몸을 이뤄버리는 연기의 힘을 보이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케미를 살리지 못하는 상대가 없다고 할 것이다.

 


부하직원 김대리의 징계를 막아보겠다고 자신의 면담 요청도 무시한 채 퇴근해버리는 전무에게 다가가 90도로 허리를 굽히는 모습부터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미리부터 안영이를 자신의 부서에 올 것처럼 자리배치를 해버리는 설레발까지 오과장의 모습은 팔색조가 초라해질 지경이다. 그런 오과장 앞에 선 것은 안영이가 아니라 장그래였다. 그랬을 때 오과장의 반응은 신입사원 장그래에게 좀 심하다 싶었지만 그렇게 솔직한 상사여서 또한 다행이었다.

 


속마음을 숨기고 인자한 척 하면서 부하직원을 골탕 먹이는 상사도 얼마든지 존재하니 말이다. 그렇게 정식 직원으로서 첫 출근한 장그래를 겸연쩍게 만들더니 오과장은 이내 옥상에 올라간 장그래에게 정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교훈을 슬쩍 알려준다. “버텨라, 그것이 이기는 것이다그리고는 우리는 모두 미생이다며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동료의식도 확실하게 알려주는 인간미를 보이기도 한다.

 

미생의 일차 목표는 완생이지만, 완생이 곧 승리는 아니다. 미생 4회에서는 곤마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그리고 그 곤마는 버리라는 교훈도 나왔다. 곤마의 규모가 작을 때 포기하면 한 번의 전투에서 지는 것이지만 곤마를 키우게 되면 바둑 한 판을 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곤마는 미생의 가장 불행한 결말이다. 미생이 곤마를 피하기 위해서 선택한 가장 큰 것은 한국 드라마의 공식이라 할 수 있는 러브라인의 거부였다. 바둑 초심자가 곤마를 알아차리는 것과 그 곤마를 포기하는 것보다 더 큰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생을 좀 더 믿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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